수련(修鍊)의 길

“성실은 하늘의 길이요, 성실하려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
(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 – 중용(中庸) 중에서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을 본적이 있는가? 언젠가 인터넷에 강수진의 발 사진이 올려지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사진 속의 발은 설명이 없다면 몹쓸 병에 걸린 줄 착각할 그런 발이었다. 강수진은 독일의 세계적인 발레단인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다. 대중이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15년 넘게 있었다. 강수진은 1985년 유명한 로잔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했고, 1986년에는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창단 이래 최연소 단원으로 합격했을 정도로 재능 있는 인재였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는 냉엄했고 그녀의 시작은 밑바닥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공연 출연조차 할 수 없었고, 겨우 무대에 서게 됐을 때도 발레단의 말석인 군무(群舞)로, 그것도 뒷줄 맨 구석이었다. 이것이 그녀의 시작이었다. 한 무리 속의 그녀를 주목하는 관객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년 만인 1996년 발레단의 ‘꽃 중의 꽃’인 프리마 발레리나에 등극했다.

그녀는 10년 간 무엇을 했을까? 강수진은 주변 동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한 연습벌레로 알려져 있다.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연습하고 1년에 무려 150여 개의 토슈즈를 갈아치운다. 그녀의 발은 오랜 수련의 상징이다. 그녀는 못생긴 발을 갖게 됐지만 동시에 남자 무용수들이 가장 함께 춤추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꽃이 되었다. ‘수진은 정열적으로 몰입하기 때문에 나 또한 어디 있는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강수진의 파트너 로버트 퇴슬리의 말이다.

조선 시대의 명창 학산수(鶴山守)도 만만치 않다. 학산수는 산에 들어가 노래 공부를 할 때 항상 신발을 벗어 앞에 놓았다고 한다. 노래 한 곡을 연습하고 모래 한 알을 주워 신발에 담았다. 또 한곡이 끝나면 다시 모래 한 알을 담았다. 그렇게 신발 가득 모래가 차면 산에서 내려왔다.

러시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스타인(Anton Grigoryevich Rubinstein)은 이렇게 말했다. “하루 연습하지 않으면 자기가 알고, 이틀 연습하지 않으면 동료가 알고, 사흘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수련에 있어 가장 위험한 적은 내부에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자신은 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자기와 싸움이 가장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상대, 속일 수 없는 상대가 가장 어려운 적 아니겠는가! 수련의 시작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수련에 있어 한 가지 비결 밖에 모른다. 지속이다. ‘오래’가 비결이라 믿는다. 아무 성과도 효과도 없는 것 같아도 믿고 그 일을 유일한 것으로 알고 그저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다보면 성과가 나오고 운이 좋으면 부와 명성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그 전에 목적이 따로 있지 않고 하는 그 마음, 그것이 목적이고 수단일 때가 있다. 강수진은 말한다, `더 못한다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 예술 인생은 끝난다`고. 수련 또한 그렇다. 수련이 하루를 잊고 일상을 떠나는 순간 나는 퇴보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수련은 모방이 아니다. 그것은 결과도 아니다. 수련은 계속되는 수행이고 실험이고, 과거보다 나아지려는 현재의 학습이고 성찰이다. 그것은 강수진의 발처럼 깨어지고 무너지고 다시 세우고 단단해지는 과정이다. 수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고와 행동을 찾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수련에는 규율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수련에 임하는 자는 자기규율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나는 규율을 ‘열정’과 ‘의지’로 규정한다. 이 둘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열정은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의지는 해야만 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해내는 것이다. 수련을 지속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열정과 의지 둘 다 필요하고 중요하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것이고 매일 그것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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