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도 보지 못한 것

우리 동네에는 아주 낡은 아파트가 하나 있다. 아이들은 그 아파트를 ‘거지 아파트’라 부른다. 그리 좋은 이름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표현은 정확하다. 겉은 상처투성이고, 누더기 옷을 입은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 아파트를 20년 이상 봐왔지만 별 느낌은 없었다. ‘재개발된다고 한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저러다 무너지는 거 아냐!’, 이 정도였다. 나는 그 아파트의 바로 옆에 산적도 있었다. 우리 집과 그 아파트는 꽤 어울리는 이웃이었다. 요즘도 하루에 적어도 2번은 그 앞을 지나간다.

언젠가, 만화가 허영만의 신간 ‘식객(食客)’을 봤다. 주인공 ‘성찬’이 사는 곳이 눈에 익었다. 프로 만화가인 허영만은 성찬의 집이 한남동의 어느 낡은 아파트를 모태로 한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는 ‘이 아파트는 조만 간에 재개발에 들어갈 예정이며(실제로 1년이 안 되어 공사가 시작됐다), 과거에 몇몇 CF와 영화 ‘올드 보이’의 화보가 촬영된 곳도 바로 이 곳‘이라고 덧붙였다.

허영만은 20년을 봐온 나보다 그 아파트를 더 잘 묘사했고 20년을 들어온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내가 보지 못한 것과 듣지 못한 것을 그는 보고 들었던 것이다. 나는 매일 눈으로 봤지만 못 본 것이 너무 많았다. 그것은 눈의 탓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의 탓이다. 눈은 인식을 따라가지 못한다. 만화가에게 그 아파트는 재료였고 정보였지만 내게는 그저 낡은 동네 아파트였을 뿐이다.

인식의 넓이와 깊이가 정보 수집의 넓이와 깊이를 좌우한다. 경영 컨설팅에 관심을 갖게 되면 컨설팅이라는 간판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알게 된다. 매일 보던 신문에 갑자기 경영 컨설팅 특집 기사가 실린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무언가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세상은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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