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결핍

이 책에는 불같은 꽃이 있다. 매일 자라는 나무가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가 있고 높은 산이 있다. 늘 흐르는 강이 있으며 뜨거운 바위가 있다. 늘 다른 듯 같은 바람도 있다. 이 꽃이 어떤 곳이고 이 나무가 어떻게 자랐고 바다 속 깊이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지, 어떻게 산이 되었고 매일 흐르는 강이 되었는지, 그토록 단단한 바위가 또 그렇게 뜨거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늘 바람처럼 사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이 책은 보기 좋게 먹기 좋게 잘 차려 준다.

꽃, 나무, 바다, 산, 강, 바위, 그리고 바람은 이 책에 등장하는 12명을 지칭한다. 사람을 되도 않는 상징으로 압축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을 글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면 이해할 수 있고 겪으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한 사람의 삶이다.

이윤기, 황석영, 박현주, 조순형, 이어령, 진중권, 설경구, 박진영, 이장희, 박재동, 장사익, 조영남.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인물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대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별로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뭐라하든 이 사람들은 독특한 사람들이다. 그렇다! 이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독특함(uniqueness)이다. 그들은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그들이 걸어온 길도 그렇다.

이 사람들이 살아온 발자취 전체를 꿰뚫는 공통점은 없다. 아니, 있다. 그러나 들으면 실망할 것이다. 저자인 이나리는 이들의 공통점을 ‘열정과 결핍’으로 압축했고 이것은 책 제목이 됐다. 열정과 결핍, 맞다. 동의한다. 이것을 이 책을 읽은 내 느낌대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치열하게 살았고 열심히 노력했다. 때로는 쉬웠고 때로는 잘 풀렸다. 이게 다다.’ 그런데 누구의 삶인들 이렇지 않겠는가.

12명은 차별화의 극치다. 블루오션이 따로 없다. 그들이 블루오션이고 그들의 삶이 블루오션에 이르는 길이다. 걸어온 길 자체가 차별화다. 그들은 성공했다. 그들은 일가(一家)를 이뤘고 대가로 존경 받는다. 그들의 성공은 차별화에 빛을 더해준다. 찬란하게 빛나는 블루오션이다.

우연이겠지만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투자 원칙인 ‘소수의 입장에 서는 것’은 12명이 걸어온 길과 다르지 않다. ‘다수를 따라가면 편하지만 큰 수익(차별화)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따라 가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길을 만들어 갔다. 어떤 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차별화에 이르렀다. 어떻게? 이들은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과 뜻대로 살려고 했고, 실제로 그랬다. 그리하여 ‘내’가 되었다. 같은 사람은 없다. 모두 제 각각이다. 그러므로 ‘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차별화인 것이다. 의도적으로 차별화를 선택한 사람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가수 박진영이다.

“내가 연세대에 입학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 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 대체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왜 그들보다 뒤처지게 됐는지. 답은 간단했다. ‘춤추고 노래하다가’.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 부분을 살리기로 했다. 그냥 연대생들은 많지만 연대생 댄스가수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박진영은 ‘연세대생 댄스가수가 되었다. 그렇게 조금 지내다가 그는 다시 변화를 시도했다. 노래만 부르던 그는 직접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스를 하기 시작했다. ‘연세대 출신의 댄스가수’에서 ‘연세대 출신의, 노래 · 작사 · 작곡 · 편곡을 하는 댄스 가수’가 됐다. 그의 변신은 계속됐다. 어느 날, 그가 ‘연세대 대학원 정칙학과에 입학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딴따라가 정치는 뭐 하러 공부해?’, 대중은 궁금했다. 그는 보통 연예인과 달랐다. 그는 ‘연세대 출신의, 노래 · 작사 · 작곡 · 편곡을 하는 댄스 가수이자 정치학과 대학원생’이 되었다. 변신을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음악전문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JYP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대표 이사 겸 프로듀서가 되었다. 그의 손을 거쳐 진주, god, 노을, 비 같은 유명 가수가 탄생했다.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 특별한 12명의 인물들, 이들이라고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약점도 갖고 있다. 다재다능하고 개성 있는 연예인이라는 박진영은 못 생겼다. 그는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리고 그의 외모를 ‘개성 있다’고 긍정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TV에서 박진영을 처음 보고 이렇게 말했다. ‘뭐냐, 뭐 저렇게 생겼냐’. ‘만화 속 괴물 같은데’, 당시 내 친구 중 한 명이 한 말이다. 흔히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라고 부르는 설경구도 다르지 않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참 웃겨요. 신인 때는 평범하다, 샌님 같다, 그래서 줄 배역이 없단 얘길 참 많이 들었어요. 근데 지금은 또, 무슨 역을 맡겨도 다 괜찮을 얼굴, 천의 표정을 가진 얼굴, 그래요. 사람이 사람 잡아가면서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안 되는 건데. 세상이 그래요.”

다시 한 번 말하겠다. 12명을 꿰뚫는 진짜 공통점은 하나다. 단순하다. 바로 독특함(uniqueness)이다. 이것이 그들이 성공한 원인은 아니다. 왜냐면 모든 사람은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그대와 똑 같은 사람도 없다. 우리는 각각 독특한 존재이다. 사는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비슷한 것일까? 주어진 길을 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길을 개척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고 싶은 데로가 아니라 살라는 데로 살기 때문이다. 12명은 이렇게 살지 않았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이고 동시에 신화 연구가인 이윤기는 이렇게 말한다.

“고등학교는 3개월 다니다가 그만뒀어요. 학교를 제가 퇴학시켜 버린 거죠. 대신 세상이라는 학교로 곧바로 쳐들어갔습니다. 좋았어요. 읽고 싶은 책, 듣고 싶은 음악을 24시간 끼고 살아도 문제 될 것이 없었어요. 지금도 전 그놈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뛰어내린 걸 내 생애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자부합니다.”

‘불타는 중년’ 조영남은 말한다.

“노자는 물처럼 살라고 했지. 그건 틀린 말이야. 인간은 역류를 탈 줄 알아야 해요. 물살 따라 흘러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내 색깔을 낼 수 있어야지. 그러려면 솔직하고 용기가 있어야 돼. 엄청난 에너지가 요구되니까.

찬사만큼 욕도 많이 받았던 이어령도 말한다.

“10년에 한 번씩은 물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정체된 삶은 지옥이거든. 나는 늘 우물을 파지만 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구덩이를 포기해버려요. 내개 필요한 건 목마름이지 물이 아니니까.”

어떤 사람은 일찍부터 다른 사람은 늦게부터, 시기가 다르고 장소가 달랐지만 그들은 이렇게 살았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욕망에 솔직했고 그것을 존중했다. 노래로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소리꾼 장사익은 47살에 데뷔했다. 한 때 그는 보험회사 직원이었고 가구점 직원이었다. 카센터 직원이었고 전자회사 직원이었다. 독서실 사장이었고 무역회사를 차렸다가 말아 먹었다. 삶의 절반 이상을 이렇게 보냈다. 그러나 이런 경력은 지금의 그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지금 그는 ‘장사익 류(類) 창법’으로 노래하는 ‘절정의 소리꾼’이다. 그는 나이 사십을 훌쩍 넘긴 어느 날 결심을 한다.

“그려. 내가 입때껏 40년 삶을 살아왔는디,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냐. 밥만 먹고 똥만 싸고, 기차 타고 마냥 어디로 떠다닌 거여. 좋다, 진짜 내가 3년만 아주 죽을힘을 다해 살아보리라.”

그는 음악에 모든 것을 걸었다. 자신을 걸었다. 한 가지 잊지 말자. 그는 여러 회사와 직업을 전전했지만, 늘 노래와 악기와 함께 했다는 것을 말이다. 첫 직장을 다니며 음악학원을 끊고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사람이 그다. 그의 외모를 보면 ‘끼’란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무대만 서면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열광하게 하고 웃고 울린다. 어떻게? 그는 가수가 되기 전부터 수십 년을 음악과 함께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1994년 11월, 신촌의 한 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시유. 드디어 갈 길을 찾은 거잖여유. 고등핵교 졸업허구 뺑뺑 돌아 여기까지 온 거지. 그러고 보니 지가 몸은 딴 짓을 해도 늘 노래 속에 살았던 것 같드라구유. 카센터에서 일할 때도 손님이 싣고 다니는 테이프들을 보면 그 사람 인생이 한눈에 쫙 보여요. 공부는 얼마나 했나, 나이는 어떤가, 성격은 어떠한가. 얼매나 재미있어유.”

저자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아니 그들의 결핍, 그들의 열정으로부터 많이 배웠다.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이유를 보았다. 그들의 위대함이 아니라 내 존재가치를 재발견했다. 살고픈 대로 살고 싶어졌고, 이전보다 조금 더 정직한 사람이 됐다. 냉정한 불, 타는 얼음의 압도적 힘에 눈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배우고 느낀 것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했던 말의 연속이겠지만 다시 한 번 이렇게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독특하다. 유일한 존재다. 이미 차별화된 존재다. 한 사람은 스스로 잠재적 불루오션이다. 자신의 길을 찾아 자신으로 살면, 그 삶은 블루오션이 된다. 자신이 만들어가는 길이 최고의 불루오션 전략이다. 이 책의 12명이 그 증거다. 살아 있는 증거다. 나또한 그럴 것이다.”

‘열정과 결핍’, 제목을 잘 지었다. 내 생각에는 사람의 마음에 착 달라붙고 책의 전체를 꿰뚫는 제목이 좋은 제목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제목은 좋다. 만약 이 책이 2003년 아니라 요즘(2005년 가을)에 출간된다면, 제목은 ‘열정과 결핍’으로 그대로 두고 부제를 이렇게 정하면 어떨까.

‘열정과 결핍: 블루오션이 된 사람들’

인터뷰 모음을 만든 책의 수준은 인터뷰어의 실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훌륭한 재료이건만 상차림이 형편없다’고 겸손해하지만 이나리 기자의 인터뷰 실력은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얼마 전에 한 조직의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참여(존경하는 선생님이 인터뷰를 진행하시고 나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다)하면서 이 점을 깨달았다. 일찍 이 책을 읽었다면 그 때 인터뷰를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인터뷰 과정을 보면서 몇 가지를 배웠다.

첫째, 준비는 철저해야 한다. 이 말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터뷰 대상자(인터뷰이)에 대해 그리고 인터뷰 주제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인터뷰 대상자가 가수라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정보를 물론이고 그 사람의 신문기사는 물론이고 그 사람의 노래를 들어야 하고 그 사람이 속한 장르에 대해서도 알아 둬야 한다. 영화배우, 화가, 소설가, 시인, 정치인, 건축가, 최고 경영자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나리는 영화배우 설경구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다섯 권의 시나리오와 단행본 두 권 분량의 기사들을 읽고 주변의 아는 사람들을 통해 사전 정보를 수집했다.

둘째, 민감해야 한다. 인터뷰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귀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인터뷰는 온 몸으로 하는 것이다. 좋은 질문을 던지고 말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일 뿐이다. 음성, 톤, 자세와 걸음걸이, 제스처, 반복되는 표현, 즐겨 쓰는 단어, 차림새, 그리고 눈빛. 이 모든 것에서 골수와 핵심을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살이고 뼈이다. 골수는 뼈를 쪼개야 나온다. 인터뷰이의 작은 목소리도 무시하면 안 된다.

셋째, (때로는) 거침없어야 한다. 상대방이 대답하기 어렵지만 묻고 싶은 것, 물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물어야 하고 답변을 들어야 한다.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무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술(skill)적으로 잘 하면 충분히 잘 넘어갈 수 있다. 그보다는 인터뷰이에 대해 잘못이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더 무례하고 위험한 것이다. 어떤 착각이나 고정관념에 빠진 인터뷰어는 인터뷰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다. 직접 끄집어내지 않은 것을 주변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터뷰 주제가 제품이나 서비스 같은 것들이라면 그마나 낫지만,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인터뷰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넷째, 노련해야 한다. ‘노련하다’는 말이 너무 모호하다면 ‘서둘지 말아야 한다’, ‘속도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긴 인터뷰라면 답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질문을 던지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을 때는 핵심으로 바로 치고 들어가야 한다. 이 책은 그냥 인터뷰가 아니라 심층 인터뷰 모음이다. 짧게는 하루 종일이나 이틀, 길면 사흘이나 나흘(3회나 4회) 인터뷰를 했다. 예를 들어, 박재동은 3일, 조순형과 조영남은 4일이었다. 가장 짧은 인터뷰는 전화 인터뷰로 진행된 미래에셋의 박현주 회장일 것이다. 미국에 있는 그와 이틀에 걸쳐 6시간 넘게 전화 인터뷰를 했다.

서점에 가면 ‘인터뷰 모음’이나 ‘좋은 책 리뷰 모음’ 식의 책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런 류의 책은 대개 독자에게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독자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이유는 깊이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책에서는 다루는 책이나 인터뷰이의 수를 줄이더라도 깊이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책(또는 영화, 음악, 사진, 그림, 조각, 건축물 등의 작품이나 산출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리뷰’와 ‘저자(전문가) 인터뷰’를 결합한 책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깊이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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