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종말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을 읽으면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왜 세계적인 사회 비평가로 평가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의 역자인 이희재의 말처럼, 리프킨은 ‘표면적으로는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현상들의 저변에 흐르는 조류를 날카롭게 파악’하여 ‘명쾌한 개념으로 요약’하여 우리에게 제시한다.

제러미 리프킨이 내세우는 문제의식은 도발적이면서도 실증적이다. 그는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화두를 제시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제기한 문제는 충분한 자료와 증거로 뒷받침된다. 숫자는 믿을 수 있고 사례는 심도 깊다. 동시에 상징적이고 명쾌하다. 그가 ‘소유의 종을 쓰는 데 6년이 걸렸으며, 350권의 책과 1천 여 편의 논문, 5만장의 색인 카드와 약 2천 개의 주석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책을 읽어보면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소유의 종말’에서 제기하는 화두는 ‘접속’이다. 여기서 접속은 인터넷 따위의 협소한 차원의 접속이 아니라 좀 더 광범위한 맥락의 접속을 뜻한다. 그는 접속을 현대 사회관계의 핵심원리로 포착한다. 그는 접속이 개인부터, 기업, 비영리 조직, 국가 그리고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리프킨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명제로 바뀌었다고 선언한다.

리프킨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접속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며 소유는 접속으로 바뀌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접속의 시대’는 어떤 시대이고 세상인가?’, 이 물음에 가장 좋은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하겠지만 제러미 리프킨이다. 그의 표현을 빌려 간단히 스케치해보자.

‘네트워크 경제의 탄생, 물품의 점진적인 탈물질화, 물질적 자본의 비중 감소, 무형 자산의 부상, 물품의 순수한 서비스로의 변신, 생산 관점을 밀어내고 사업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은 마케팅 관점, 모든 관계와 경험의 상품화, 재산을 소유하는 것보다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 우리의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이 점차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상, 문화 자체가 최고의 상품으로 각광받는 세상, 인간관계에 항상 돈이 개입되고 체험도 돈을 내야만 할 수 있는 세상, 자율성을 가진 자아는 물러나고 복수로 존재하는 인격, 연극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 사회는 연극적 용어로 파악되고 각 개인의 삶도 현실 무대와 가상 무대에서 공연되는 수많은 각본과 대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되는 세상 …’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익숙해질 세상이다. 실제로 이것들 중 일부를 우리는 현실에서 비교적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회사에서 몇 시간 동안 인터넷 접속이 안 된 적이 있었다. 불과 몇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큰 불편을 겪었다. 고객에게 약속한 메일과 자료를 보내줄 수 없었고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 없어 사내 커뮤니케이션도 잠깐이었지만 원활하지 않았다. 온라인상에서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몇몇 동료는 답답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국내의 한 대형 수영장은 청결 유지를 명목으로 외부의 음식물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그 수영장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안에서 뭔가 하려면 돈이 든다. 먹고 마시는 것부터 심지어는 앉는 공간에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곳에서 ‘체험’은 곧 ‘돈’이다.

내가 든 예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리프킨은 접속이 지배하는 세상이 우리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심각한 악영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의 문제 제기는 개인과 조직을 아우른다. 이것은 책의 내용을 이끄는 방향이자 큰 줄기에 해당하므로 중요하다. 두 개만 옮겨 본다.

“인간의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다면, 중요하지만 상업성은 없는 사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기 인생의 길잡이가 될 만한 생각을 상업의 영역에서 가져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문명에서,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관점, 의견, 관념, 개념이 존립할 수 있는 여지가 과연 있을까?”

“대부분의 관계가 상업적 관계로 변하고 모든 개인의 삶이 24시간 내내 상품의 틀에 갇혀 있을 때, 비상업적 관계, 다시 말해서 혈연, 이웃, 문화적 취향의 공유, 종교적 결사, 민족의식, 형제애, 시민 의식에 바탕을 둔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간 그 자체를 사고팔고, 삶이라는 것이 한낱 계약과 금전적 도구에 의해서 결합된 상업 거래의 연속에 불과한 것으로 변질될 때, 애정, 사랑, 헌신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전통적 상호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제러미 리프킨은 접속의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 경험과 관계의 상품화’라고 주장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의 신영복 교수의 생각과 유사하다. 신영복은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商品社會)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제러미 리프킨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신영복이 말하는 상품교환 속에 담긴 인간관계를 넘어 인간관계 자체를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인간관계의 상품화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인간관계의 상품화는 곧 문화의 상품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런 추세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앞으로 사회 전체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미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것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비판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인간의 정신과 문화의 영역까지 완전히 상품화 시켜버린 최첨단 자본주의에 의해 문화적 기반과 사회적 자본이 고갈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그의 문제제기는 계속된다.

“재산을 소유하는 것보다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 문화 자체가 최고의 상품으로 각광받는 세상, 인간관계에 항상 돈이 개입되고 체험도 돈을 내야만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문화가 시들면 문화의 가장 중요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와 공감은 어떻게 될까? 네트워크 경제와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하는 권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자본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다면 결국 인류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사회적 신뢰와 공감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우리는 상업과 교역을 제대로 해낼 수가 있을까?”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회적 신뢰와 사회적 교환이 어느 정도 발전한 다음에야 비로소 상업과 교역이 등장했다.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문화는 사회 자본을 축적하고 시장과 교역을 가능하게 만드는 막중한 역할을 해왔다. 한 사회의 문화 기구(교회, 세속 기관, 민간 단체, 상조회, 스포츠 클럽, 예술 집단, 비정부 기구 등)는 사회적 신뢰의 공급원이었다. 건강한 시장 경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사회적 신뢰와 문화적 다양성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 건강한 공동체는 건강한 경제의 전제 조건이다. 그런데 상업 영역이 문화 영역을 집어삼키기 시작하면서 상업적 관계를 낳는 사회적 토대 자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제러미 리프킨은 ‘문화 영역과 상업 영역의 적절한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접속의 시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말한다. 동시에 이것은 중요한 과제다. 산업 시대에 자연 환경과 자원이 인간의 맹목적인 개발과 남용으로 고갈의 위기에 처한 것처럼, 문화 자원도 과도한 영리 추구로 인해 언제 고갈되어 버릴지 모른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는 성공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제 무덤을 파기 시작한다.

문화 영역과 상업 영역의 적절한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레미 리프킨은 시민 교육을 통한 문화 영역의 강화, 문화의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시민 사회 조직의 적극적인 활동 등을 강조한다. 이 부분은 12장에 나온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훌륭한 번역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유의 종말’은 내용의 수준과 분량이 만만치 않다. 음미하고 생각할 것들이 많다. 이런 책은 번역이 시원찮으면 가독성은 떨어지고 사고의 집중은 어려워진다. 다행히 이 책의 번역은 매우 훌륭하다. 번역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번역자의 역량과 노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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