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와 야마하의 오토바이 전쟁

1950년대 초반, 일본의 오토바이 산업은 50개가 넘는 경쟁자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수요는 매년 40% 이상 증가하고 있었다. 혼다(Honda)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일본 오토바이 산업을 선도했다. 혼다의 시장 장악으로 인해 다른 많은 오토바이 제조업자들이 파산하거나 이 산업에서 철수했다. 1950년대에 50여 개 제조업체들이 경쟁하던 것이 1960년에는 30개, 1965년에는 8개, 1969년에는 4개 업체로 줄어들었다. 살아남은 회사는 혼다(Honda), 야마하(Yamaha), 스즈키(Suzuki), 가와사키(Kawasaki)뿐이었다.

혼다는 오토바이 제조업체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자동차 시장으로 진출한 기업이었다. 이에 반해, 야마하는 악기 제업체로 시작해서 오토바이 시장에 진출했다. 혼다는 세계 모든 주요 국가의 오토바이 시장에서 선도 기업이 되기 위해 확장정책을 추진하였다. 1960년대 초반 미국 시장에 진출한 혼다는 당시 미국 최고의 오토바이 제조업체였던 할리 데이비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미국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혼다는 오토바이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자 자동차 산업으로 다각화하여 1975년에는 오토바이보다 자동차 사업에서 더 많은 수익을 얻게 되었다. 혼다는 자동차 사업에서의 성공을 위해 기업의 가장 우수한 자원, 즉 뛰어난 인력, 이용 가능한 자금, 기술력을 자동차 사업에 집중했고 자동차 사업에 투입한 막대한 투자는 오토바이 사업에서 벌어들인 자금으로 충당했다.

혼다가 자동차 사업에서 성장세를 탈 무렵, 일본의 또 다른 오토바이 제조업체인 야마하가 오토바이의 생산을 증가하기 시작했다. 야마하는 일본 오토바이 시장에서 혼다와 스즈키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7년에는 스즈키를 제치고 2위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혼다의 시장 점유율은 55%가 넘었지만, 야마하는 조금씩 혼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혼다의 일본에서의 오토바이 시장 점유율은 1960년대 중반 65%를 정점으로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다. 1981년 혼다의 시장 점유율은 약 38%로 줄어들었다. 이에 반해 야마하는 1967년 2위 업체가 된 이후, 14년이 지난 1981년 시장 점유율을 37%로 증가하였다. 혼다가 잃은 시장은 야마하가 얻은 것과 거의 비슷했다. 이제 야마하는 오토바이 시장의 선도자이자 세계 제일의 오토바이 생산업체인 혼다를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한 것이다. 야마하의 경영진들은 ‘혼다를 따라 잡을 기회가 왔다’고 확신했다. 혼다는 자동차 사업을 추진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계속해서 경영자원의 상당 부분을 오토바이에서 자동차로 전환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마하의 최고경영자는 언론을 통해 종종 혼다에 도전하는 발언을 했다.

“혼다의 관심은 오직 네 발 달린 것에 있습니다. 오토바이 분야에서 일하던 그들의 최고인력은 대부분 자동차로 옮겨 가 버렸어요. 그들에 비하면 우리 야마하는 오토바이 생산만 전문으로 하고 있죠.”

“생산설비만 충분히 있다면 우리가 혼다를 이길 수 있다.”

야마하는 모든 경영자원을 오토바이와 그 관련제품에 집중시킴으로써 혼다를 바짝 추격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혼다는 35개의 모델을 보유하고 있었고 야마하의 모델 수는 18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1년에는 야마하가 60개의 모델을 가짐으로써 혼다의 63개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1970년 초반 혼다가 2개의 새 모델을 내놓으면 야마하는 1개의 새 모델을 시장에 출시했던 것이 1981년에는 혼다가 17개의 신규 모델을 내놓은 반면 야마하는 18개의 신모델을 출시했다.

1981년 8월 야마하는 ‘연간 100만 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이 공장이 완성되면 야마하의 연간 총생산능력은 혼다보다 약 20만대를 앞서게 되어 400만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야마하는 혼다를 능가하는 생산능력을 앞세워 일본 최고의 오토바이 제조업체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당시 야마하의 고이케 사장은 공장 건설계획을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와 혼다의 격차는 우리의 공급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우리 야마하가 오토바이의 주요 생산자로서 더 이상 2위 자리에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야마하는 성장 잠재력을 가진 다른 사업 분야가 없었기 때문에 오토바이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1981년 회계 연도에서 야마하는 생산량과 수익 면에서 야마하 역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야마하가 오토바이 사업에 투자한 막대한 돈은 대부분 내부 자금이 아니라 외부 차입금이었다. 당시 야마하의 경영진은 야마하가 오토바이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에 회사 전체를 건 도박을 하고 있었다. 야마하와 혼다의 수익성은 비슷했지만 야마하의 부채 대 자기자본 비율은 3 : 1 정도인 반면에 혼다는 1 : 1도 되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 혼다는 미국의 자동차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야마하의 공격적인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동차 사업에만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혼다도 야마하의 성공과 자신에 대한 도전 행위를 모를 리 없었다. 이미 1978년 초 혼다의 카와시마 사장은 공개적으로 “내가 이 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한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고 강조한 바 있었다. 그러나 야마하에게 혼다는 어떤 반격도 실제로는 하지 않고 있었다.

1982년 1월 주주총회에서 야마하의 고이케 사장은 다시 한 번 혼다를 자극했다. 고노케 사장의 발언은 기존에 비해 더 노골적이었다.

“1년 후면 우리가 국내 시장의 리더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2년 뒤 세계 1위는 우리의 것입니다.”

코이케 사장의 말은 마침내 혼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야마하 따위가 잠자는 사자의 꼬리를 밟았다. 야마하를 박살내 버리겠다!”, 혼다의 카와시마 사장은 야마하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혼다는 즉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 후 18개월 동안, 혼다의 시장 점유율은 1981년의 38%에서 47%로 증가하였고 야마하는 37%에서 27%로 감소하였다. 혼다는 가격을 내리고 판촉비용과 매장재고를 증가시켰다. 혼다와 야마하 간의 경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인기모델의 소매가격은 30% 이상 하락하였다. 그 당시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50cc 오토바이의 가격은 10단 기어가 달린 자전거보다 더 싸게 팔렸다. 엄청난 가격할인에도 불구하고 혼다는 야마하보다 10%나 높은 마진율을 딜러들에게 보장해주었다. 또한 혼다는 반격의 경쟁무기로 제품다변화를 활용하였다. 야마하와의 일전을 선포한 후 18개월 동안 혼다는 81개의 신모델을 출시했다. 이 수치는 같은 기간 야마하가 출시한 34개에 비해 두 배가 훨씬 넘는 수치였다. 1970년대 말에 두 회사가 각각 60개 정도의 모델만을 보유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신모델 출시 경쟁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혼다의 경우는 상식 밖이었다. 혼다는 단종(斷種) 모델을 검토하면서 제품라인을 훨씬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구성하였다. 혼다는 1년 반 사이에 81개의 새 모델을 도입하고 32개의 모델을 단종 시키면서 총 110개가 넘는 제품라인을 보유하게 됐다. 반면 야마하는 3개의 모델만 없애고 34개의 신규 모델을 선보여기 때문에 모델 변화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혼다의 신모델 확대전략은 야마하에게 가격인하만큼이나 치명적인 것이었다. 신모델 도입은 기술과 디자인 측면에서 소비자에게 훨씬 강력하게 어필하였고, 오토바이 딜러들은 혼다 제품을 판매할 때 더 큰 인센티브를 가지게 되었다. 신모델의 증가는 기존 모델의 단종 혹은 판매 감소를 초래했기 때문에 오토바이 제품의 수명주기는 점차 짧아졌다. 이러한 상황은 야마하처럼 1위 업체를 추격하는 회사에게 더 불리했다. 왜냐하면 도전자는 주어진 시간 내에 필요한 연구개발비를 충당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고, 늘어나는 구형 제품의 재고를 없애기 위해 가격 할인 정책을 고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마하의 재무 구조는 혼다와 비교하면 부채비율이 높고 건실하지 못했다.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높은 부채비율은 야마하에게 그야말로 독이었다.

결국, 야마하는 매출이 50% 정도가 감소하면서 큰 손실을 입게 됐다. 1983년 초, 야마하의 팔리지 않은 제품은 일본 오토바이 산업 전체 재고량의 절반에 달했다. 당시 야마하의 판매율을 감안할 때, 이 정도의 재고량은 야마하의 일 년 매출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재고를 처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재고를 처분하려면 딜러들에게 혼다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거나 가격 할인을 해야 하는데 야마하는 그럴 형편이 못됐다. 1981년 3 : 1 정도였던 부채 대비 자기자본 비율이 불과 2년 만인 1983년에는 7 : 1로 증가하였다. 야마하의 재무 상태는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반면 혼다의 경우는 자동차 사업의 성공으로 꾸준히 수익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무상태가 상당히 튼튼했다.

1983년 1월, 혼다의 반격이 시작된 지 불과 1년 만에 야마하의 사장 고이케는 사실상 타월을 집어던지며 항복을 선언했다.

“우리는 제품개발에서나 판매력에서나 결코 혼다의 경쟁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 저는 이제 혼다와의 전쟁을 끝내고 싶습니다. (…) 앞으로는 경거망동을 삼가고 야마하의 상대적인 지위에 만족하겠습니다.”

1983년 4월 14일 야마하는 후반기 손실이 40억 엔임을 발표하였다. 배당은 80% 삭감되었고 차기배당은 하지 않는 것으로 예정되었다. 생산계획은 18% 축소된 180만 대로 결정되었고, 2년에 걸쳐 700명의 인원을 감축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야마하 그룹의 회장인 가와카미는 “우리는 다이빙제트기처럼 뛰어들었다. 나의 무지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고이케 사장은 사임했고 에구치가 새롭게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야마하의 쇠퇴는 계속됐다. 혼다는 계속해서 신모델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야마하의 숨통을 조여 갔다. 파산을 면하기 위해 야마하는 토지와 건물, 설비 등의 고정 자산을 헐값에 매각했다. 직원들의 평균 봉급은 삭감되었고, 일체의 보너스 지급도 중단됐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에구치 사장은 애원하듯 말했다.

“현재의 시장 상황은 모두가 야마하의 책임이기 때문에 저는 먼저 우리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고 다른 회사(혼다를 의미함)와의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 물론 경쟁은 있겠지만 (…) 저는 우리의 2인자로서의 상대적인 위치에 대한 상호인식을 바탕으로 할까 합니다.”

혼다는 야마하의 무조건 항복 발표가 있은 후, 야마하와의 전쟁을 끝마쳤다.

참고: 글로벌 시대의 경영전략(2판), 장세진, 박영사, 224 – 2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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